[사연을 담다] 최태명 장로 – 최고의 선물

 


 

부모라든지 사랑하는 사람, 가족 간의 사랑도 많이 느꼈지만 저는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도 일찍 돌아가셔서 사랑의 대화가 부족했어요. 그런데 정명석 목사님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람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시간과 모든 말의 표현을 다해서 굉장히 잘해주시더라고요. 뭐냐면 거기 온 사람들에게 전부 그림을 그려서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저는 지금까지 다섯 아이들을 기르고 있지만 저도 부모님한테 편지 한통 받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제 다섯 아이들한테 생일선물로 케이크는 사줬는데 편지는 한 통도 못 써봤어요. 그런데 정명석 목사님은 자기한테 온 사람들에게 다 일일이 한 명도 빠짐없이 그림을 그려주시더라고요. 그림에다가 그 사람 이름, 부인 이름, 애들 이름가지도 써서 선물을 해주시더라고요.

근데 그 당시에 어느 정도로 바빴냐면요. 해외 인터넷으로 말씀을 전하는 상황이다 보니까 하루에도 한 두건 있는게 아니라 5,6건 있는 거예요. 말씀을 전하시고 또 내려오셨다가 또 쉬었다가 다시 또 말씀을 전하시고 내려오셨다가… 이걸 계속 반복하니까 굉장히 피곤해 하셨어요.

그리고 그림을 그릴 시간이 따로 없었어요. 문 앞에다 그림을 그리는 도화지랑 물감이랑 다 항상 준비해 놓는 거예요. 문을 들어갈 때 한 장, 그리고 나올 때 한 장, 따로 시간을 낼 수 없으니까… 그러다 보니까 굉장히 피곤해하셨어요.

한번은 주일예배를 전하러 오시는데 두 시간을 늦게 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두 시간 뒤에 오셨어요. 거기서 말씀 전하는 장소까지가 30m밖에 안됐거든요. 30m를 오는데 두 시간이 걸렸다는 거예요. 현기증이 나기 시작하는데 너무 과로하신거예요. 발걸음을 옮겨 놓을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피곤이 누적됐죠. 그런데도 사람들에게 갈 때 꼭 그림을 그려서 주시더라고요.

저는 그림을 받고 너무 감사했어요. 그냥 편지를 써주시는 것도 아니고 다른 선물을 사서 줄 수도 있잖아요. 근데 정명석 목사님이 잘 그리시는 색칠해서 그림을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너무 감사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그걸 제가 가보로 가지고 있는데 사람을 대하는 정성과 사랑이 지극하시구나…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삼수를 해서 해양대학교를 들어갔는데 다른 학교를 2년 다니다가 다시 한국해양대학교를 들어가기 위해서 2학년 1학기 때 (다니던 대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시험을 봐야 되는데 시험까지 네 달 정도의 시간이 있었어요. 2년이 지나서 책도 많이 바뀌었더라고요. 시간이 너무 없는 거예요. 마음이 얼마나 조급하겠어요. 그걸 못하면 군대를 가야해요. 영장도 나왔어요. 춘천 102보충대 하고 딱 나왔더라고요. 그러니까 놀 시간이 없죠.

한 달을 꼬박 독방에 갇혀서 밖에 안나오고 공부를 해봤어요.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변하냐면 한 달 동안 있다 보니까 벽이 나한테 오는 거 같아요. 벽을 깨부수고 싶더라고요. 갑자기 정신이 이상해지는 거예요.

그 당시에 강원도 태백이라는 곳에서 공부를 했는데 태백에는 도서관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어디를 갔냐면 다방에서 공부를 했어요. 다방에서 무려 한 달을 공부했어요. 나중에는 사장님이 제가 공부를 하고 있으니까 제 자리에 불도 밝혀주시더라고요. 그래서 갇혀있는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제가 그 한 달 동안 조금이나마 느껴봤거든요.

그런데 정명석 목사님께서는 계속 독방에서 옥살이를 하시면서 하루에도 수백 통의 편지를 써주신단 말이에요. 말씀도 써주시고 하루에 볼펜을 두 자루 쓰신다는데 아마 써본 사람만 알 거예요. 그게 얼마나 많은 양인지를… 제자들을 향한 사랑을 가히 측량할 수 없구나… 헤아릴 수가 없어요. 어느 정도의 사랑인지를.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몸과 마음을 다하시는구나. 정성을 다하시는구나. 감사의 마음을 늘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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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을 담다] 석막리 교회의 십자가 하선국씨

 

저는 석막리 115번지에서 출생했어요. 그리고 1939년 1월 27일이 (음력으로) 태어난 날이에요. 정인석 씨 (정명석 총재의 첫째 형)하고는 중학교 때, 이희동 목사하고 나하고 3총사 형제로서 잘 지내는 그런 찰나였어요.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를 대전으로 나가게 됐어요.

그래서 내가 사진을 하나 찍어줘야 되겠다. 마음을 먹고 연락을 했더니 그날이 토요일인가 됐을 건데, 카메라를 메고 내가 이제 인석이 집으로 갔어요. 갔더니 가족들이 전부 보리타작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나 왔다고, 이제 고등학교 가면 못 오니까 오늘 바로 찍자고 인석이한테 얘기했어요. 얘기했더니 막 세수들을 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이 인석이 방 앞에서 찍은 사진이에요.

그렇게 진학 과정을 밟기 전에 그걸 찍어서 해드리고 그렇게 하고 간 거예요.

 

 

내가 군대를 다녀와서도 진산에 사진관을 차렸었어요. 한번은 밖에 나와 보니까 누가 차에서 뭘 내리더니 뭔가를 이렇게 끌고 오더라고. 보니깐 정명석 목사예요.

“그게 뭐냐?”

“형님! 지금 금산에 가서 십자가를 맞춰 갖고 왔어요.”

그 십자가를 (석막)교회 위에 설치해야 하잖아요. 진산에서는 못 만드니까 금산 가서 맞춰서 그것을 차에서 내렸어요. 내렸는데 십자가가 길잖아요. 그런데 정명석 목사 키가 작으니까 십자가를 짊어지고서 ‘들덕들덕들덕….’ 하면서 석막교회 쪽으로 넘어간 거예요.

정명석 목사가 새로 만들어 온 그 십자가를 메고 석막리 가는 길로 넘어갔다니까요. 금산에서 그걸 맞춰 와서… 앞섭골로 넘어간 거예요. 그렇게 월명동 사람들이 석막 교회를 힘들여서 지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은 거예요.

하여튼 내가 지금 생각나는 것은 정명석 목사가 그 십자가를 지고서 넘어갔을 때 십자가가 자기 몸보다 크니까 이것을 메고서 ‘들덕들덕….’ 키가 작으니까 그 고생을 하면서 넘어가는 것이 지금도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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